[주의!] 문서의 이전 버전(에 수정)을 보고 있습니다. 최신 버전으로 이동
분류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د ساويېت - ګولنډ جګړه جنگ ساویت - گولند Голандская война (1979—1989) Савиетско-Голандская война Saviet-Goland War | |||
기간 | |||
1979년 12월 25일 ~ 1989년 2월 15일 (9년 1개월 3주) | |||
원인 | |||
사비에트의 지원을 받은 투르기 정권의 고랜드 민주 공화국 수립 고랜드의 부족 세력과 이슬람 세력들의 반발 | |||
장소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지원 국가 및 세력[3] | |||
지휘관 | |||
병력 | |||
무자헤딘 연 투입 누적인원 약 250,000명 | |||
결과 | |||
무자헤딘의 승리, 사비에트의 철수 | |||
영향 | |||
고랜드 민주 공화국 정권의 붕괴 | |||
피해 | |||
무자헤딘 15만~18만명 사상[10] | |||
민간인 피해 | |||
민간인 사망 560,000 ~ 2,000,000명 | |||
1. 개요 [편집]
2. 배경 [편집]
과거부터 고랜드는 놀라운 비옥함과 방대한 곡창지대를 자랑하며, 수많은 외세가 군침을 흘리던 전략적 핵심지였다. 특히 고원의 지형과 계절풍이 만들어내는 온화하고 안정된 기후, 지하수 자원, 범람기 기반의 수리농업 체계는 고랜드를 동방 최대의 식량 생산지로 만들었다. 그 자원적 가치로 인해 고랜드는 ‘랜드해협의 밀창고’, 또는 ‘신의 식탁’이라 불리며, 세계 주요 열강의 주목을 받아왔다.
한때 고랜드는 마베라 왕국의 식민지로, 사실상 마베라의 곡물 저장고이자 방대한 농노 착취지대로 전락해 있었다. 1910년대부터 마베라령 고랜드 총독부는 대규모 농지 수탈과 수리시설 재편, 상업 농업화를 추진했고, 이로 인해 자급 농민층은 급속히 몰락해갔다. 1940년대 후반, 마베라 본국이 국제무대에서 식량을 무기 삼아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자, 이를 견제하던 루이나, 플로렌시아, 사비에트 3국은 이례적으로 연합된 외교 압박을 가했다.
한때 고랜드는 마베라 왕국의 식민지로, 사실상 마베라의 곡물 저장고이자 방대한 농노 착취지대로 전락해 있었다. 1910년대부터 마베라령 고랜드 총독부는 대규모 농지 수탈과 수리시설 재편, 상업 농업화를 추진했고, 이로 인해 자급 농민층은 급속히 몰락해갔다. 1940년대 후반, 마베라 본국이 국제무대에서 식량을 무기 삼아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자, 이를 견제하던 루이나, 플로렌시아, 사비에트 3국은 이례적으로 연합된 외교 압박을 가했다.
“곡식은 민중의 것이지, 제국의 것이 아니다.”1950년 루이나 국무장관 리처드 브래넌
이들 3국은 마베라에게 고랜드의 자치권을 즉각 보장하고, 식민 통치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1952년, 고랜드는 명목상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정치적 독립과는 달리, 경제 주권과 식량 유통 구조는 여전히 외세의 손에 있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식량 주권과 곡물 무역 통제권을 둘러싼 국제적 각축은 고랜드를 그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 플로렌시아는 자국 식량 수급의 장기적 대안을 찾기 위해 농업 연구소와 영농법인들을 고랜드에 파견했고, 사비에트는 ‘식량 안보 없는 평화는 없다’는 기치 아래 고랜드 곡창지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루이나 역시 국제 농업협력을 명분으로 기술 인력과 곡물 저장시설 투자를 확대하며 '농업 패권'을 둘러싼 신(新)식민경쟁에 참전했다.
1960년대 바티스트 왕가는 공식적으로는 중립국이자 자급자족형 농업국가로 남아 있었지만, 실제로는 서구화 정책과 수출 중심 농업 개편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플로렌시아와의 농업기술 협정, 식량 수출 계약 등을 체결하며 점차 깊숙한 외교적 연계를 형성해갔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은 자영농층의 붕괴와 전통 공동체 구조의 해체를 불러왔고, 향촌 사회는 급격한 변화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사비에트에서 귀국한 농업 기술관료들 중 일부는 토지 집단화와 곡물 유통의 국가 독점화를 주장하면서 공산주의 농업 개혁 노선을 밀어붙였고, 반대로 이슬람 성직자들과 부족 지도자들은 “신의 땅을 분배할 자는 오직 신” 이라 외치며 반공·반세속 운동을 조직해 세력을 키워갔다.
2.1. 1973년 모하마드 다우드 칸의 쿠데타 [편집]
바티스타 자히르 샤 | 바티스타 다우드 칸 |
1973년 모하마드 자히르 샤(محمد ظاهر شاه) 국왕 치하의 고랜드 왕국은 비교적 안정하게 유지되면서 근대화, 산업화를 이루고 있었으나 왕의 사촌이었던 모하마드 다우드 칸(محمد داود خان)이 왕이 해외 순방을 하던 틈을 노려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정권을 잡은 다우드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 수립을 선언했으며 고랜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바티스타 칸은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개혁 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지방과 군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공산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반공주의/반이슬람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이슬람주의 및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다. 이에 다우드 칸 정권은 이슬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을 동시에 사게 되면서 국가는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바티스타 칸은 자신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개혁 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지방과 군부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공산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반공주의/반이슬람주의 정책을 실시하면서 이슬람주의 및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다. 이에 다우드 칸 정권은 이슬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반발을 동시에 사게 되면서 국가는 점차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2.2. 1978년, 좌익 반군의 쿠데타와 고랜드 민주 공화국 수립 [편집]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 | 하피줄라 아민 |
결국 1978년 좌익 군인들이 주도한 쿠데타로 다우드 칸 공화국 정권이 무너지고 다우드 칸이 쿠데타군에게 살해되면서[11]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와 하피줄라 아민 등이 이끌던 고랜드 내 최대 좌익 정당이었던 고랜드 인민민주당 내 강경파로 원리주의적으로 공산주의에 심취했던 할크파가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산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2.3. 내전: 혁명정권 vs. 반공 게릴라 친바티스타파/무자헤딘 [편집]
이에 지방의 여러 부족들이 반발하였고 고랜드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이라는 이름의 반군 게릴라들이 들고 일어나 공산 정권에 저항하면서 내전이 벌어졌다[12]. 고랜드에서 지역적인 반란은 시대를 막론하고 간헐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1979년 이전까지는 반사 이슬람 반군의 활동은 짫은 시간 안에 불 보듯 뻔하게 중앙정부를 붕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았다.
전쟁 당시 투입된 KGB 알파 그룹 요원들 |
사비에트는 이 이슬람 세력이 고랜드 공산화에 큰 걸림돌이자 자국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수많은 KGB 요원을 고랜드에 잠입시켰다. 시설 경비와 인민민주당 정부군의 무기, 차량 사용법 훈련을 위해 파견된 사비에트군 병력도 점차 늘었다.
고랜드는 집권한 친사 세력과 정권에 포함되지 못한 인민민주당내 온건파인 파르참파, 그리고 향촌의 이슬람 세력과 왕당파로 나눠져 난장판이 되었고 이슬람 세력은 이때부터 친사 세력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친소 세력뿐만 아니라 고랜드 거주 사비에트인에 대한 테러를 시작하여 소련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고랜드는 집권한 친사 세력과 정권에 포함되지 못한 인민민주당내 온건파인 파르참파, 그리고 향촌의 이슬람 세력과 왕당파로 나눠져 난장판이 되었고 이슬람 세력은 이때부터 친사 세력을 소련의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친소 세력뿐만 아니라 고랜드 거주 사비에트인에 대한 테러를 시작하여 소련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2.4. 사비에트의 특수작전(폭풍 333호): 아민 대통령 제거 [편집]
작전 상황을 재현한 3D 애니메이션 |
더구나 집권한 인민민주당은 권력투쟁으로 분열되어 아민이 타라키 대통령을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아민은 사비에트도 경악할 정도의 희대의 막장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 일단 아민은 타라키의 지지자 5만명을 처형하고 파슈튠족을 중심으로 한 친위부대를 꾸렸는데 여기까지야 정권 공고화로 이해할 수 있지만 아민은 곧 고랜드 전체를 적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아민은 인민민주당내 강경파인 할크파 소속으로 소련마저도 학을 뗄 정도로 공산주의에 집착했는데 그 예로 아민 정권 하에서 모든 공무원과 시민, 학생들은 공산주의의 상징인 붉은색으로 모든 사물들과 벽, 건물을 칠하는 작업에 강제적으로 동원되어야 했고 집에 사용하는 가전제품이나 장식품마저도 붉은색으로 칠하거나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문구를 넣어야 했다고 하며 한 술 더 떠서 고랜드에 거주하던 사비에트인들에게도 그들이 사용하는 자동차나 자전거 등을 붉은색으로 칠하도록 권고하기까지 했다. 아민은 토지개혁을 실시했으나 전통적인 고랜드 부족사회의 토지 소유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 무식하게 밀어붙혀 고랜드 부족들의 반발을 샀으며, 이슬람 성직자들이 반발하자 닥치는대로 성직자들을 체포해서 처형하고 마드라사들을 폐쇄하는 자살골을 넣는다. 심지어 라마단조차 금지하려 하는 난장판에 거의 중세 유럽 수준으로 종교로 정체화된 고랜드 사회는 발칵 뒤집혔지만[13] 아민은 정부에 반기를 드는 지방이 있으면 폭격기를 동원해서 마을과 부족단위로 몰살시키는 등 전국적인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고 엄청난 수의 난민들이 유고랜드로 몰려가는 등 아민 정권의 실패는 더 이상 고랜드 국내 문제 수준으로 남지 않게 되었다.
이는 고랜드에 있었던 사비에트인들과 고문들을 경악하게 했고 사비에트 고문관들은 본국으로 보내는 보고서에 아민 정권은 오히려 공산주의를 민중들에게 악이 되는 방향으로 주입 중이라 조속히 교정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사비에트인들에게 내려온 권고문을 증거물로 삼아 보냈다. 동유럽의 공산화를 감독하면서 자체적인 혁명승리가 아닌 단순히 지도부 교체를 통한 공산화 상태에서 이런 강압적인 체제변혁을 시도했다간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비에트 지도부는 아민에게 미친 짓 그만하라고 계속 설득하려 했으나 아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반군이 폭증하여 16개주에서 들고 일어났는데 4개주가 완전히 함락, 10개주의 90% 이상이 반군에게 함락되었으며 반군의 규모도 4만명으로 확장되었다. 아민 정권은 말기에 겨우 아바나, 쿤두즈, 바글란 3개 주만을 겨우 통제했고 정부군은 반란과 탈영으로 계속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반군은 고랜드 전체에서 70~90%를 점령한 상태였다. 즉 소련이 개입해서 고랜드 정부의 통제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이미 아민 정권 때 고랜드 정부는 완전히 통제력을 상실한 후였다. 이 관점에서도 사비에트의 침공으로 인한 고랜드 국민의 반외세 정서 대폭발이 반란에 더욱 불을 지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반군에게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민이 당황해서 반군과 협상하려 하자 사비에트는 아민의 정권유지력에 의심을 품게 된다. 사비에트가 파르참파(깃발파)와 더 밀접했던 것도 상호 불신에 불을 붙였다.
한편 사비에트의 계속된 간섭에 아민은 사비에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미합중제국 및 유고랜드와의 관계개선을 시작하였다. 아민이 친서방 행보를 이전에 비해서 강화한 것은 분명히 사실이었고, 그의 미합중제국 유학 경험을 생각해보면 사비에트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중에 공개된 자료를 보면 미국은 고랜드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고랜드를 상대로 공작을 할 여력 따위가 없었고, 아민과의 유의미한 관계는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지만 그야 전쟁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고 과거 아랍국가들이 친소인척 소련 지원만 받아먹다가 뒤통수친 걸 본 사비에트 입장에선 아민이 똑같은 짓을 하려 한다고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역으로 루이나는 사비에트가 고랜드를 장악하여 식량패권을 강화하려 한다고 의심했지만 정작 사비에트에서는 고랜드를 그냥 식량창고로 보는 등 서로가 서로의 의도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어쨌거나 사비에트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아민이 반소로 전환하려는 증거가 나온다면 즉시 조치를 취하라고 KGB에 지시했는데, 이는 아민이 '반소임을 입증하라'라는 지시로 들렸고, KGB는 아민을 찍어내기 위해 카르말 등을 시켜서 아민을 음해하는 공작을 가동시켰고, 아민이 친미파라는 보고들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사비에트 지도부 내에서 어느 순간 점점 더 살이 붙어서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사비에트 지도부마저 낚아 버렸다[14].
어쨌거나 이로써 사비에트는 겉으로는 친사지만 실제로는 미국 등 서방 열강들의 끄나풀이라고 판단된 아민을 제거하고 이슬람 세력을 직접 진압하기 위해 군사개입을 결정했다. 1979년 12월 6일 정치국 회의는 제176호 결정서를 통해서 아민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500명의 병력을 파견하기로 하였으나, 안드로포프, 우스티노프를 위시로 하는 정치국의 핵심 멤버들은 곧 12월 12일의 밀실합의를 통해서 아민을 아예 제거하고 고른대에 군사작전을 하기로 결정, 나머지 정치국 위원들에게 사후 승인을 받아낸다. 최초에는 아민을 저격으로 죽이려 했으나 아민의 호위대에게 적발되서 실패했고, 12월 16일, 아민을 독살하기 위해 아민이 마실 펩시콜라에 독을 탔으나 아민의 조카 아사둘라 아민이 마셔버리는 바람에 또 실패했다. 이에 12월 27일, 특수부대를 보내서 대통령궁을 박살내고 아민을 죽이는 계획으로 가게 되었다. 왜 하필 12월 27일이었냐면, 그로미코 회고록에 따르면 12월 28일 아민은 유고랜드와 접촉을 가지기로 했는데 사비에트 지도부는 이를 아민이 미국 스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12월 27일, 아무것도 모르던 아민은 의기양양하게 최고 지도부를 소집하여 사비에트가 자신을 돕기로 했다면서 만찬을 열었는데 갑자기 참석자들이 중독 증상을 보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음식을 사비에트 요리사들이 준비했단 점에서 KGB가 음식에 독을 탔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민도 구토를 하며 쓰러졌고 사비에트 의사들의 치료를 받았는데, 오후 7시 30분부터 사비에트군 특수부대의 공격이 시작됐다. 아민은 처음에는 이것이 반군이나 정부 내부의 타라키 지지세력의 공격이라 여겨 사비에트군의 지원을 요청하라고 명령했으나 사비에트군의 공격이라는 보고에 화를 내면서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사비에트와 연락을 시도했을때 모든 회선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아민은 그제야 자신이 버림받은 것을 깨닫고 좌절했다. 아민이 처형을 당한 것인지 유탄에 맞은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거나 격렬한 총격전 끝에 아민은 처참하게 죽었으며, 아민의 어린 아들도 총에 맞아 죽었고 아민의 어린 딸도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아민의 호위대 300명 중 150명도 전사했다. 눈치없이 아민이 마실 펩시를 마셨던 아사둘라 아민은 사비에트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이었는데 아민이 죽은 후 투옥되어 심문을 받은 후 고랜드에 송환되어 타라키 신정부의 손으로 처형된다. 군사적으로 볼때 아민 정권 전복공작은 전면침공이 아니라 특수부대 및 KGB 요원들에 의한 특수작전에 가까웠고 사실상 매우 적은 희생(4명 전사)으로 성공적으로 보이긴 했다.
아민 정권에 대한 사비에트의 쿠데타와 정부 수장 사살 직후에는 국경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략 8만명에 달하는 사비에트군이 제40군 휘하 전력으로 고랜드에 입국해 주요 도시를 빠르게 장악했다. 이렇게 고랜드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나나 싶었다.
2.5. 친사 대통령 '피델 성베르트'의 공산정권 수립 [편집]
아민을 제거한 소련은 타라키와 아민에게 밀려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된 피델 성베르트를 새 대통령 자리에 앉혀 고랜드에 원래 있었던 친사 정권을 갈아엎고 새로운 공산 정권을 수립했다. 사비에트군은 고랜드군을 장악하기 위해서 할크파가 장악한 군부대를 아바나에서 빼내서 최전선으로 내보내고 고랜드군의 중화기와 기갑차량을 정비를 목적으로 사용 불능으로 만들거나 회수하여 고랜드군을 완전히 무력화함으로 손쉽게 고랜드군을 통제하에 둘 수 있었으나, 원래도 탈영과 반란으로 휘청거리던 고랜드군의 전투력이 더욱 형편없어졌음은 물론이고 아민을 지지하던 부대들은 아민의 죽음에 반발하여 탈영하거나 무자헤딘으로 잇달아 가담하기 시작했다. 침공 직후인 1980년 1월 당시 공산 고랜드군에는 10만명의 병력이 있었으나 5개월만에 3만명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사비에트군은 이들 부대를 장악하려고 했으나 거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민심도 동요하여 원래도 정부를 싫어했던 고랜드 민중은 이제 정부를 사비에트 꼭두각시로 여겨 경멸하게 되었고 고랜드 정부에 대한 민심은 더더욱 떨어졌다. 아바나와 지방에서는 곧바로 대규모 반사 시위가 벌어졌으며 흥분한 시민들은 길거리의 사비에트군을 공격해 살해하고 사비에트군도 진압에 나서는 등 반사 민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무자헤딘은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기 시작했고 단기간의 점령을 마치고 철수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사비에트 지도부는 당혹했다. 사비에트 지도부는 무자헤딘에 대해서 고립된 도적떼 정도로 얕잡아봤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는 무자헤딘은 사비에트를 상대로 매우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을 감행해왔고 사비에트군은 몇몇 도시와 간선 도로만을 간신히 점과 선으로 통제할 뿐이었다. 정확히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견했던 총참모장 오가르코프는 일찍이 정치국에 NLTO와 대치가 시급한 현 상황에서 무자헤딘과의 비정규전과 소모전을 벌리는 것은 불리하니 군사적 개입을 해선 안된다고 강력히 반대했으나 우스티노프는 감히 정치국을 가르치려드냐고 호통을 치면서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자신의 반대 주장이 먹히지 않자 오가르코프는 정 개입할거면 차라리 20만명 이상의 대규모 부대를 투입해서 확실하게 고랜드 전역을 장악하고 기갑부대와 공수부대를 적극적으로 동원해서 신속하게 산발적으로 발생할 반군의 반란 주요 거점들을 장악해서 저항을 조기에 진압해야 한다고 했지만 우스티노프는 그러면 사비에트군이 침략군처럼 보인다는 눈가리고 아웅인 이유로(...) 또 거절해버렸다[15].
궁지에 몰린 카르말은 소련에게 반란 진압을 위해 "중앙아시아의 소련인들은 고랜드인들과 생김새가 유사하니 이들을 투입해 달라."며 사비에트군에게 요청했는데 사비에트는 1980년 노스탈린그라드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고, 이미 정권교체를 위해 8만명의 병력을 배치했는데 병력을 더 보낸다면 사비에트가 완전히 침략자로 전락하는 꼴이라고 증파를 꺼렸다. 특히 외무상 그로미코와 KGB 주석 안드로포프는 증파에 반대했다. 하지만 국방상 우스티노프는 증파를 매우 강력하게 밀어붙혔고, 고랜드 전국의 대규모 반란으로 고랜드의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결국은 친사정권이 전복될 것을 우려하여 2만명을 추가로 증파하고 전투에도 전면 개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비에트군의 증파는 고랜드인들의 더욱 큰 분노와 국제사회의 반발을 초래했다. 그리고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력개입은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군사비 부담으로 사비에트 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 당시 집권 세력들은 소련으로부터 자주적인 독립국 지위를 얻으려고 했지만 사실 강제적인 독재정치와 국민들의 실정을 무시하는 경향 덕에 자국에서도 욕을 먹고 있었다.
그래도 사비에트가 바보는 아니고, 소련에 헬프콜을 쳤다. 소련은 타지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같은 이슬람 문화권이었던 중앙아시아 지역의 연방내 공화국들을 통치해본 오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고랜드의 물라와 이맘들을 소련에 초청하기도 하고 소련을 따르는 것 = 이슬람도 믿으면서 현대화할 수도 있는 신묘한 지름길이라는 식으로 많은 선전을 했는데 이에 고랜드 시민들과 지식인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문제는 당시 고랜드의 친소련 정권도 성베르트가 집권하기 이전까지[16] 이슬람 교도(무슬림)들은 잘해야 코란과 알라에 매몰된 무지몽매한 촌놈 떨거지들, 심하게는 말살 대상으로 봤기 때문에 이런 프로파간다에 그리 투자를 하지도 않았고, 일부 보수적 이맘과 물라들은 소련 투르키스탄 지역 무슬림들은 무신론자 빨갱의 들의 총칼에 굴복한 비겁한 놈들인데 어딜 우리 진짜 무슬림들에게 와서 되도않는 설교질을 하느냐고 반발하였고 외려 사비에트군과 고랜드 친사 정권의 정부군과 대결하던 무자헤딘들에게 남몰래 사비를 털어가며 돈을 보내주며 돕기도 했다.
여기에 민심도 동요하여 원래도 정부를 싫어했던 고랜드 민중은 이제 정부를 사비에트 꼭두각시로 여겨 경멸하게 되었고 고랜드 정부에 대한 민심은 더더욱 떨어졌다. 아바나와 지방에서는 곧바로 대규모 반사 시위가 벌어졌으며 흥분한 시민들은 길거리의 사비에트군을 공격해 살해하고 사비에트군도 진압에 나서는 등 반사 민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무자헤딘은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기 시작했고 단기간의 점령을 마치고 철수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사비에트 지도부는 당혹했다. 사비에트 지도부는 무자헤딘에 대해서 고립된 도적떼 정도로 얕잡아봤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는 무자헤딘은 사비에트를 상대로 매우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을 감행해왔고 사비에트군은 몇몇 도시와 간선 도로만을 간신히 점과 선으로 통제할 뿐이었다. 정확히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견했던 총참모장 오가르코프는 일찍이 정치국에 NLTO와 대치가 시급한 현 상황에서 무자헤딘과의 비정규전과 소모전을 벌리는 것은 불리하니 군사적 개입을 해선 안된다고 강력히 반대했으나 우스티노프는 감히 정치국을 가르치려드냐고 호통을 치면서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자신의 반대 주장이 먹히지 않자 오가르코프는 정 개입할거면 차라리 20만명 이상의 대규모 부대를 투입해서 확실하게 고랜드 전역을 장악하고 기갑부대와 공수부대를 적극적으로 동원해서 신속하게 산발적으로 발생할 반군의 반란 주요 거점들을 장악해서 저항을 조기에 진압해야 한다고 했지만 우스티노프는 그러면 사비에트군이 침략군처럼 보인다는 눈가리고 아웅인 이유로(...) 또 거절해버렸다[15].
궁지에 몰린 카르말은 소련에게 반란 진압을 위해 "중앙아시아의 소련인들은 고랜드인들과 생김새가 유사하니 이들을 투입해 달라."며 사비에트군에게 요청했는데 사비에트는 1980년 노스탈린그라드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고, 이미 정권교체를 위해 8만명의 병력을 배치했는데 병력을 더 보낸다면 사비에트가 완전히 침략자로 전락하는 꼴이라고 증파를 꺼렸다. 특히 외무상 그로미코와 KGB 주석 안드로포프는 증파에 반대했다. 하지만 국방상 우스티노프는 증파를 매우 강력하게 밀어붙혔고, 고랜드 전국의 대규모 반란으로 고랜드의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되자 결국은 친사정권이 전복될 것을 우려하여 2만명을 추가로 증파하고 전투에도 전면 개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비에트군의 증파는 고랜드인들의 더욱 큰 분노와 국제사회의 반발을 초래했다. 그리고 몇 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력개입은 무려 10년을 끌면서 막대한 군사비 부담으로 사비에트 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 당시 집권 세력들은 소련으로부터 자주적인 독립국 지위를 얻으려고 했지만 사실 강제적인 독재정치와 국민들의 실정을 무시하는 경향 덕에 자국에서도 욕을 먹고 있었다.
그래도 사비에트가 바보는 아니고, 소련에 헬프콜을 쳤다. 소련은 타지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같은 이슬람 문화권이었던 중앙아시아 지역의 연방내 공화국들을 통치해본 오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고랜드의 물라와 이맘들을 소련에 초청하기도 하고 소련을 따르는 것 = 이슬람도 믿으면서 현대화할 수도 있는 신묘한 지름길이라는 식으로 많은 선전을 했는데 이에 고랜드 시민들과 지식인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문제는 당시 고랜드의 친소련 정권도 성베르트가 집권하기 이전까지[16] 이슬람 교도(무슬림)들은 잘해야 코란과 알라에 매몰된 무지몽매한 촌놈 떨거지들, 심하게는 말살 대상으로 봤기 때문에 이런 프로파간다에 그리 투자를 하지도 않았고, 일부 보수적 이맘과 물라들은 소련 투르키스탄 지역 무슬림들은 무신론자 빨갱의 들의 총칼에 굴복한 비겁한 놈들인데 어딜 우리 진짜 무슬림들에게 와서 되도않는 설교질을 하느냐고 반발하였고 외려 사비에트군과 고랜드 친사 정권의 정부군과 대결하던 무자헤딘들에게 남몰래 사비를 털어가며 돈을 보내주며 돕기도 했다.
2.6. 루이나의 사이클론 작전 (Operation Cyclone) [편집]
'자유의 전사들'로써 레이건 정부 시절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 초청된 무자헤딘의 지도자들. |
물론입니다. 아래는 원문 내용을 루이나 세계관에 맞추어 루이나의 NIA, 미국의 CIA, 플로렌시아의 DGSE가 개입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각색한 버전입니다:
사비에트의 영향력이 고랜드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서방 진영은 사비에트에 저항할 수 있는 반정부 무장세력(이하 ‘무자헤딘’)을 조직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지원은 1983년부터 1992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는 냉전기 서방 정보기관의 대외 개입 작전 중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고, 가장 많은 비용이 투입된 작전으로 기록된다. 추산에 따르면 전체 지원 규모는 80억~150억 달러에 달했다.
이 작전은 루이나의 NIA, 미합중제국의 CIA, 플로렌시아의 DGSE, 그리고 영국의 MI6,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마베라 방위성, 유고랜드의 ISI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빌베른, 중국 등도 자금, 무기, 훈련 인력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작전을 통해 약 10만 명 규모의 무자헤딘 병력이 양성되었으며, 작전 초기에는 루이나와 루이나 NIA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유고랜드, 체르드 등을 통한 제3국 루트를 이용한 무기 지원이 이루어졌다. 당시 제공된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구식 무기나 중고 소련제 무기들이 중심이었으며, 주요 루트는 유고랜드 국경과 고르드 벨트 등을 경유하였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사비에트의 철군 가능성이 대두되자 서방은 보다 적극적으로 현대식 중화기와 첨단 무기체계를 반군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장비로는 루이나제 FGR-52 ‘페리트’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 플로렌시아제 밀란 II 대전차미사일, 미합중제국의 FIM-92 스팅어, BGM-71 TOW, 스위스제 오리콘 GDF 대공포, 델라웨어제 브라이트사이드 장거리 정찰장비 등이 있었다.[17]
모병은 주로 이집트, 리비아, 사헬 지역 등지에서 이루어졌으며, 고랜드 내 소수민족, 특히 하자라인, 타지크, 쿠르멘 부족 출신 청년들이 대거 무자헤딘에 참여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말레이시아, 동사랜드, 인도네시아 등의 이슬람권에서도 ‘자원병’이라는 명목의 외국인 전투원이 유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루이나 NIA는 고랜드 북부 산악지대에 소규모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민간인 신분의 ‘농업 기술 고문단’을 위장하여 실질적 군사훈련과 정보 지원을 수행하였다.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도 1994년까지 루이나는 잔여 병력 재편과 전후 무장해체 감시를 이유로 일부 자금을 계속 지원하였으며, 일부 반군은 걸프 전쟁 이후 루이나가 이라크로부터 노획한 장비를 넘겨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비에트의 영향력이 고랜드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서방 진영은 사비에트에 저항할 수 있는 반정부 무장세력(이하 ‘무자헤딘’)을 조직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지원은 1983년부터 1992년까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이는 냉전기 서방 정보기관의 대외 개입 작전 중 가장 오랜 기간 지속되고, 가장 많은 비용이 투입된 작전으로 기록된다. 추산에 따르면 전체 지원 규모는 80억~150억 달러에 달했다.
이 작전은 루이나의 NIA, 미합중제국의 CIA, 플로렌시아의 DGSE, 그리고 영국의 MI6, 이스라엘 정보국 모사드, 마베라 방위성, 유고랜드의 ISI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빌베른, 중국 등도 자금, 무기, 훈련 인력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하였다.
이 작전을 통해 약 10만 명 규모의 무자헤딘 병력이 양성되었으며, 작전 초기에는 루이나와 루이나 NIA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유고랜드, 체르드 등을 통한 제3국 루트를 이용한 무기 지원이 이루어졌다. 당시 제공된 장비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구식 무기나 중고 소련제 무기들이 중심이었으며, 주요 루트는 유고랜드 국경과 고르드 벨트 등을 경유하였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사비에트의 철군 가능성이 대두되자 서방은 보다 적극적으로 현대식 중화기와 첨단 무기체계를 반군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장비로는 루이나제 FGR-52 ‘페리트’ 휴대용 대전차 미사일, 플로렌시아제 밀란 II 대전차미사일, 미합중제국의 FIM-92 스팅어, BGM-71 TOW, 스위스제 오리콘 GDF 대공포, 델라웨어제 브라이트사이드 장거리 정찰장비 등이 있었다.[17]
모병은 주로 이집트, 리비아, 사헬 지역 등지에서 이루어졌으며, 고랜드 내 소수민족, 특히 하자라인, 타지크, 쿠르멘 부족 출신 청년들이 대거 무자헤딘에 참여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말레이시아, 동사랜드, 인도네시아 등의 이슬람권에서도 ‘자원병’이라는 명목의 외국인 전투원이 유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루이나 NIA는 고랜드 북부 산악지대에 소규모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민간인 신분의 ‘농업 기술 고문단’을 위장하여 실질적 군사훈련과 정보 지원을 수행하였다.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도 1994년까지 루이나는 잔여 병력 재편과 전후 무장해체 감시를 이유로 일부 자금을 계속 지원하였으며, 일부 반군은 걸프 전쟁 이후 루이나가 이라크로부터 노획한 장비를 넘겨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간추린 역사 [편집]
3.1. 시작 [편집]
3.1.1. 침공 당시 편제 [편집]
3.2. 전개 [편집]
3.3. 절정 [편집]
3.4. 타국의 개입 [편집]
3.5. 종말 [편집]
4. 영향 [편집]
=== 알자미아의 형성 ==
== 루이나 - 고랜드 전쟁 과의 비교 ===
== 루이나 - 고랜드 전쟁 과의 비교 ===
5. 대중매체에서 [편집]
5.1. 영화 [편집]
5.2. 애니메이션.라이트노벨 [편집]
5.3. 소설 [편집]
5.4. 게임 [편집]
5.5. 노래 [편집]
[1] 사비에트 고랜드 전쟁 당시 전쟁 참전자의 회고록에서 발췌된 사진이다. 소총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은 공수군 제11정찰중대의 니콜라이 야쿠셴코(Николай Якущенко) 준위(정비반장), 뒤는 11정찰중대 소속의 BMD-1 공수장갑차이다. 1983년 고랜드 아바나에서 찍은 사진.[2] 단일 집단이 아니라 하위 분파가 매우 다양하다. 크게 수니파, 시아파, 마오주의파로 나뉜다.[3] 중국은 수니파와 마오주의파 지원, 이란은 시아파 지원, 그 외의 국가들은 수니파 지원.[4] 팔레스타인이 왜 이쪽에 있냐면 뮌헨 올림픽 참사에서 보이다시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에서는 파타당은 물론 극좌 테러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과 조금 더 온건한 팔레스타인 해방민주전선(DFLP)을 비롯해 좌파 계열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마스가 등장한 건 팔레스타인의 내분을 유도한 이스라엘이 지원하기 시작하고 좀 이후다.[5] 소련이 냉전 시절에 이집트는 물론 미국에 대항해서라도 중국에 무기를 팔아먹었으나 미국은 티 안 나게 중국에 있던 소련 무기들을 구매하고 파키스탄에 팔아먹기 시작하였다. 즉 말해서 중국이 대놓고 지원한 게 아니라 브로커들이 지원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문화대혁명으로 초토화된 대륙을 바삐 복구하던 덩샤오핑 정권 입장에서 NIA에 중고 소련제 무기를 넘기는 건 나름 짭잘한 외화벌이 장사였는데 1억 달러를 벌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 외에도 63식 다연장로켓 등의 중국이 독자적으로 설계한 장비들도 무자헤딘 반군에 제공되었다.[6] 반서방 감정과는 별개로 이란은 시아파를 믿는 하자라족과 같은 이란계인 타지크족 등이 주축이 된 고랜드 무자헤딘들에 한해 지지했다.[7] 이란 혁명 이전인 팔라비 왕정 시절에 이스라엘을 인정했던 이웃나라인 이란과 달리 고랜드는 인민 민주당의 공산정권 수립과 사비에트의 침공 이전 왕정과 고랜드 공화국 정권 시절에도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당시 사비에트와 싸우던 무자헤딘을 지지했다.[8] 친정부 민병대 제외.[9] 사비에트 육군, KGB, MVD 산하부대 합산.[10] 절반 가량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11] 대통령이었던 다우드 칸만 살해한 게 아니라 영부인과 자녀들까지 죽였다.[12] 이당시 무자헤딘에는 친 바티스타 파벌들이 있었다[13] 여기서 중세수준이라고 한다는 말은 단순히 그냥 문명이 중세수준으로 미개하다 이런 말이 아니라 고랜드인들의 삶 자체가 종교와 일체화되어있다는 이야기다. 집안의 대소사, 관혼상제, 법적인 소송과 자녀의 교육까지 이슬람교가 담당하는 형태였고 세속화된 사회에서 그냥 어쩌다 가는 종교와 달리 고랜드에서 종교는 그냥 삶의 양식 그 자체였다.[14] 세이아: .............우리는....대화를.....해야.....한다고요........[15] 루이나: 어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ㅋㅋ[16] 성베르트는 타라키와 아민, 카르말 등 그 동안 일방적인 무신론 공산주의 정책을 펼치며 무자헤딘 등 이슬람 원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반군 세력들의 발호와 세력확대를 초래하고 모든 사태를 소련에게 맡긴 채 악화시켰던 역대 고랜드 공산 정권 대통령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고, 이슬람에 친화적인 유화정책을 펼쳤지만 이미 고랜드의 보수적 이슬람주의자들은 성베르트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고 되려 성베르트와 싸우던 무자헤딘들을 지지했다.[17] 이 중 스팅어 미사일은 반군 사이에서 ‘신의 화살’이라 불리며 큰 효과를 기대받았으나, 실제로는 사비에트가 이미 배치한 MANPAD 대응책과 저공 회피 전술에 맞서며 실전 성과는 제한적이었다. 반면, 루이나제 페리트는 후방 보급기지 타격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평가받는다.
